언젠가 픽사(PIXAR)의 연구원으로부터 애니메이션 개발 프로세스에 대해서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애니메이션 개발 프로세스를 간단하게 말하면 ,

1) 이야기가 진행될 그럴듯한 세계를 먼저 디자인하고 
2) 그 세계에 있을법한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한 뒤 
3) 스토리를 구성하는 3단계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환경->캐릭터->스토리 순으로 한다는 것인데요, UX 디자인프로세스에서 환경과 사용자를 먼저 고려하고 나서 제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또한, 스토리 작가와 그 스토리를 3D 로 코딩하는 개발자 사이의 관계가 항상 경험하는 Designer와 Engineer 간의 관계와 흡사한것을 발견했습니다. 스토리는 엉망이고 그래픽만 뛰어난 애니메이션은 관객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스토리는 좋지만, 만족할만한 비주얼이 제공되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고요. 마치 제품디자인과 기능처럼요. 둘 다 만족 시키는 일은 항상 어려운 일이지만 Pixar는 둘 다 훌륭히 해내고 있죠.

Pixar의 ‘스토리작가-아티스트-디벨로퍼’의 관계와 우리 회사의 ‘기획자-디자이너-엔지나어’와의 관계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Iteration 디자인과 관련된 교훈이었습니다. 스토리작가가 머리를 쥐어짜 콘티를 완성해가면 스토리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이 마구 뜯어고쳐 결국 기존의 줄거리는 완전히 뒤집혀 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를 꾸려가야 한다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Remember, Storyboarding is actually Stor-re-boarding.


잠깐 화제를 돌려, 한때 세계계 2%만 풀 수 있다는 아인슈타인이 냈다고 (잘못) 알려진 퀴즈가 돌던 적이 있었죠. 저는 이 문제를 한 교육과정에서 풀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강사가 이야기해준 이 문제를 풀기 위한 힌트는, 한 번에 완벽한 답을 찾아내려고 하지 말고, 일단 한가지 가정을 세운뒤 진행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설이 맞으면 다행이고 아니면 다시 그 가정을 세웠던 곳으로 돌아와 다른 선택지로 진행을 해보는 것이죠. 이것은 지뢰 찾기 게임을 할 때나, Sudoku 퍼즐을 풀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과제를 진행할 때도 비슷한 상황에 놓일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의 아이디어 중 몇 개를 선정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하면, 누군가는 일단 Affinity diagram을 통해 몇 가지 그룹으로 만들고서 평가를 하자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누구는 엑셀도표에 넣고 Criteria와 비중을 정해서 모든 아이디어를 일단 voting 해보자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아직 평가할 수준이 아니니 좀 더 구체화가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누구는 외부 전문가나 소비자를 불러서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날은 온종일 이러자 저러자 이야기만 하다가 결론을 맺지 못하고 끝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방법이 좋을지 계속 따지는 것보다는 일단 아무것이나 한 가지 방법을 빨리 정해서 앞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어차피 현 시점에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야 어떤 방법이 최선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고, 선택한 방법으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빨리 되돌아가서 다른 방법으로 할 시간을 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몇 년 전 기존에 진행했던 과제와는 다른 형태의 결과물을 내야하는 과제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따라할만한 프로세스도 없었고 당장 다음 주에 해야 할 일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어느날은 리서치를 통해 백여 가지의 사회현상들을 정리하고 이것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이런 제안을 합니다. “이것을 재료로 현상별로 3개씩 아이디어를 내자. 그리고 그 아이디어별로 또 3개씩 아이디어를 내자. 그럼 정말 많은 아이디 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를 비롯한 다른 디자이너들은 “어떤 항목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올 수도 있고 어떤 아이디어는 하나도 나오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게 무슨 무식한 방법이냐?” 라면서 당장 반박을 했지만. 어떻게 결국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고, 결론적으로 그 과정을 끝내고 나니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방법이 옳았는지 틀렸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한 것은 일단 앞으로 진행 했다는 것이지요. 그때 누군가 그런 방법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정하려고 또 많은 시간을 소비했을 것입니다. 

 
이전에 작성한 “사용자 경험 디자인 프로세스” 포스트에서 세부 Activity들이 포함된 자세한 프로세스는 과제 결과보고서를 할 시점에야 미리 계획하기 보다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면서 작성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를 드린적이 있습니다. 프로세스가 일련의 작은 언덕들을 넘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과정이라면, 이정표가 없는 언덕 밑에서 어느길로 가야 할지 의논할 시간에 손바닥에 침 튀겨서 일단 앞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일단 언덕위에 올라서야 다음 진행할 방향이 보이고 잘못된 길이라면 빨리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I want to fail as quickly as possible  - Andrew Stanton (토이스토리, 벅스라이프, 니모를찾아서, Wall-E의 Director)


사실 Iteration 이야말로 UCD(User Centered Design) 프로세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 혹은 이미 지나온 일들을 뒤집는 것이 두렵거나, 내 과제의 진행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싫어서 소홀했었는데Pixar의 디자인 프로세스 이야기는 이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Posted by 진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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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ijoux.tistory.com 김유민 2009.02.01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예술의 전당 픽사전 갔을 때 봤었던 "우리는 3/4를 스크립트, 스토리보드에 할애한다" 라는 문구가 생각나네요. 보통 한 작품당 3~5년 정도 걸리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말 끝없는 iteration 이겠네요 ;) 유익한 글 잘 보고 갑니다.

    • 진영규 2009.02.05 0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렇군요. 3D작업보다 스토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 한다니 인상적이네요. 저도 전시 갔었으면 좋았을텐데 무척 아쉬워 하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