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들렀던 식물원에서 한 유리공예 제품을 보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을 보고 받은 감상은 ‘정말 볼품 없다’ 였습니다. 습기로 꽉 찬 온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을 역광으로 등지고 있던 이 작품은, 녹색의 식물원을 배경으로 마치 보호색을 띄고 있는 것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작품 곳곳에 물때와 이끼도 끼어 있었고요. 칙칙하고 음습한. 그런 느낌이었죠. 그리고 곧 기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뒤 몇 개월 후, 한 미술관 에서 마침 Chihuly 라는 낯선 작가의 특별전을 관람 했는데요. 그 곳에서 식물원에서 봤던 그 작품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는 환경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외부의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특별 전시장, 그리고 그 유리 공예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려 주는 눈부신 조명들. 관람객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 댔고 저도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었죠. 분명 같은 작가의 비슷한 작품이었지만 그때와는 정말 딴판이었습니다.

전시를 더 둘러보면서 이 작가가 바로 라스베가스의 벨라지오 호텔 로비 천정 장식을 한 작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죠. 호텔로비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어울려 화려함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던 바로 그 작품의 작가.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가장 초라하고 볼품 없다고 생각했던 작품의 작가와 가장 화려하다고 생각했던 작품의 작가가 동일인 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의 작품이라도 주변 환경의 도움 없이는 그 빛을 발하기 힘든 모양입니다. 

좀더 가까운 곳에서 환경에 어울리는 디자인의 예를 찾을 수 있었는데요, 아래 좌측의 사진은 흔히 볼 수 있는 수도 꼭지의 사진 입니다. 익숙한 디자인이고 큰 불편 없이 쓸 수 있게 되어 있죠. 저 사진만 보면 별다른 문제를 발견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수도 꼭지가 있는 곳이 공중 화장실 이라면 개선의 여지가 생깁니다. 제가 관찰하는 동안에도,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 잠깐 동안 냉 온수를 적절히 조절해 가면 수온을 맞추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화장실에 있는 수도 꼭지는 그냥 원 터치로 적당하게 하게 미지근한 물이 나와 주면 그만입니다. 오른쪽 수도 꼭지처럼요. 하지만 오른쪽 수도 꼭지를 우리 집 욕실에 설치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각자 어울리는 환경이 있기 마련이죠.  

지하철 안의 승객들이 현재 역이 어디인지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러한 문제해결 과제를 지하철 제조사에서 풀려고 하면 아마 차장이 음성으로 안내를 해주거나, 기차 내에 LED 전광판 등을 두어 현재 역을 디스플레이 하는 방법 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역을 기차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각 역마다 위치를 알려 주는 일종의 송신 장치가 설치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환경을 고려하면  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역 플랫폼에 역명이 적힌 표지를 더 크게, 더 많이 붙여 두는 것이죠. 그러면 승객들은 창문을 통해 쉽게 현재 역을 알 수 있을 테고요.

제품 중심으로 인터랙션를 개발하다 보면 환경까지 고려할 겨를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휴대폰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발 하는 경우의 예를 들 면, 실제로 그 사용자에게는 휴대폰 뿐 아니라 MP3P, 전자사전, 게임기, 또는 다른 휴대폰등 다른 디바이스들도 함께 있을 수 있고, 사용자 외에도 친구나 가족, 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주변 사람들도 여러 가지 디바이스들은 갖고 있을 테고요. 하지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마치 블루스크린 같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사용자와 휴대폰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가정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부분 이미 익숙하시겠지만, UX 디자인을 할 때 아이디어의 객관성을 유지하고, 타겟 사용자층을 공략하기 위해 Persona를 활용해 사용자 시나리오를 만드는 방법이 사용 됩니다. Persona 없이 디자인을 하면 어느새 사용자 입장이 아닌 자기 자신, 즉 디자이너 입장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죠.

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디자이너 들도 각자 자기가 살아온 환경이 있기 때문에, 아이디어들을 내거나 해법을 제시할 때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겪어 온 과거나 현재 환경을 중심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대중 교통이 촘촘하게 잘 되어 있는 도시에 사는 사람, 자가용 외에는 다른 교통 수단이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 사람 수보다 자전거 수가 더 많은 도시에 사는 사람… 이들 각각은 설령 같은 직업, 성별, 나이, 소비성향을 같고 있더라고 하더라도, 즉 동일한 Persona 라고 하더라도 다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한다면, 다양한 사용자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양한 환경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Persona와 유사하게 몇 가지 대표적인 환경을 정의하고, Environa 라는 이름을 붙여 봤습니다. 여기에는 사용자들이 해당 제품 또는 서비스를 사용하는 환경을 정의해서 기술하게 되는데요, 아까의 예를 다시 들어 일반적인 직장인 Persona 의 출근 시나리오만 하더라도 뉴욕, LA, 암스테르담, 서울을 모델로한 4개의 Environa 를 각각 고려할 경우 지하철, 자가용, 자전거, 회사 출근버스의 서로 다른 4가지 출근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통뿐 아니라 쇼핑은 주로 어떻게 하는지 등의 상업 환경, 인구는 얼마나 많은지, 전반적인 생활 수준은 어떤지, 여가 시설은 어떤지 등을 Environa에 포함시키면 좀 더 다양하고 객관적인 시나리오들을 도출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저 처럼 평생을 한 도시에 산 사람은 그 도시의 환경을 벗어나서는 생각하기 힘들 거든요. 꼭 도시와 같은 넓은 범위의 환경뿐 아니라, 사무실, 집, 길거리 등의 Environa 들 도 정의가 가능 할 것 같습니다.



'Proce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Pixar의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세스와 Iteration  (2) 2009.01.23
사용자 경험 디자인 프로세스  (12) 2008.11.12
DVD와 초컬릿  (22) 2008.05.26
Posted by 진영규
,